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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힐 때까지…취재는 멈추지 않는다
KBS <제2의 n번방 ‘엘’ 추적기>

등록일 : 2022-10-04

‘n번방 사건’의 범인이 체포된 지 불과 2년 만에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이 다시 벌어졌다. ‘엘’로 명명된 주동자는 교묘하고 악랄한 수법으로 미성년자에게 접근해 범죄를 저질렀다. 사건의 시작부터 범인을 여전히 쫓고 있는 현재까지 ‘제2의 n번방’ 취재 과정을 들어본다. 편집자 주

 

취재는 지난 5월 말, 한 통의 제보로 시작했습니다. 미성년자 A의 피해 내용이었습니다. 다수의 가해자가 미성년자를 대화방에 초대해 성적으로 비하·대상화하고 있단 내용이었습니다. 수위는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제보자와의 연락은 어려웠습니다. 전화번호도 알려주지 않았고, 하루에 한 번 저희의 연락에 대답하는 정도였습니다.

 

설득 끝에 며칠 뒤 제보자에게 다시 연락이 왔고, 추가로 받은 제보 내용은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A 외에 또 다른 미성년자들이 강제로 사진과 영상을 찍으며 성착취를 당하고 있다는 내용이었고, 수백 개의 영상이 첨부돼 있었습니다.

 

텔레그램 대화와 영상물을 토대로 유추해보니 주동자는 한 명으로 압축됐습니다. 추후에 저희가 ‘엘’이라는 가칭으로 보도한 그였습니다.

 

정확한 피해를 확인하고자 피해자 A에게도 SNS를 통해 연락해봤지만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A는 ‘신고하지 않기로 했다’는 SNS 글을 올린 채 사라졌습니다.

 

제보자가 보낸 300개가 넘는 영상 속엔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미성년자들이 등장했습니다.

 

영상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여러 피해자의 몸에 새겨진 ‘엘 주인님’이라는 글자였습니다. 피해자들은 영상에서 자신의 이름을 말하거나, 집 주소까지 알리기도 했습니다. 가해자가 신상을 카메라 앞에서 말하게 시킨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빌미로 계속해서 영상 촬영을 하도록 협박하는 악순환이 이어졌습니다.

 

이 같은 미성년자 성착취 영상은 소지하고 시청하는 것만으로도 처벌받을 수 있습니다. 취재팀은 법률 자문을 거쳐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고 제한된 인원만 파일을 열어봤습니다.

 

‘엘’ 흔적을 쫓다

 

취재팀은 직접 문제의 텔레그램 방에 접근하기로 했습니다. 텔레그램에는 검색만 하면 들어갈 수 있는 ‘음란물 유포’ 방이 여럿 있었습니다. n번방 사건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이 방에서 많은 이들이 ‘엘’의 영상을 찾고 있었습니다. 검색만 하면 들어갈 수 있는 텔레그램 방이 ‘하위 방’이라면, 그 위에는 ‘상위 방’이 있었습니다. 하위 방에서 적극적으로 수백 개 이상의 채팅을 하거나 음란물을 직접 공유해야만 상위 방으로 올라갈 수 있는 자격이 생겼습니다. ‘엘의 자료’에 다가가기 위한 가담자들의 아우성이었습니다. 취재팀도 이런 행위를 해야 상위 방에 들어갈 수 있었던 건데 직접적인 범죄라서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취재팀은 우선 하위 방들을 중심으로 ‘엘’의 흔적들을 모았습니다. 채팅방에 있던 다른 사람이 하는 ‘엘’에 대한 평가, 활동 내역까지 꼼꼼하게 확인했습니다. ‘엘’이 했던 작은 농담까지도 놓치지 않고 모두 채증했습니다. 나중에 ‘엘’의 정체를 밝히는 데 하나의 증거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입니다. ‘엘’은 보도를 하기 직전인 8월 29일 오후 4시까지도 한 텔레그램방 안에서 참가자들과 대화를 하며 성착취를 즐기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엘’의 정체를 밝히는 것만큼 피해 규모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했습니다. 얼마나 유통됐는지를 파악해야, 제작-유통-소비로 이어지는 성착취 범죄의 고리를 파악할 수 있을 거라 봤습니다.

 

불법 음란사이트는 물론 다크웹, 트위터 등 검색할 수 있는 수단들을 가리지 않고 피해 영상이 올라간 흔적을 수집했습니다. 이미 ‘00녀’라는 이름으로 불법 음란사이트에서 영상이 판매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성착취와 불법 음란물 세계에서, 이미 ‘엘’의 존재는 유명세를 넘어 고유명사처럼 불렸습니다. 그렇다면 피해자들의 상황은 어떨까. 취재팀이 접촉한 피해자는 두 명. 하지만 한 명은 응답하지 않았고, 다른 한 명은 카카오톡 인터뷰에 이어 어렵게 전화 인터뷰까지 이어갔습니다.

 

이 피해자는 n번방을 추적했던 ‘불꽃’을 사칭한 ‘엘’에게 속아 영상을 촬영했습니다. ‘불꽃’ 사칭범은 피해자에게 “당신이 SNS에 올렸던 영상을 유포하고 있는 자가 있는데, 그의 주거지를 알려면 해킹을 하면 된다. 해킹하려면 당신이 그와 10시간 이상 대화를 이어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피해자는 유포범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불꽃’ 사칭범을 믿고 ‘엘’과 밤새 대화를 했고 결국 성착취 피해자가 됐습니다.

 

얼룩소와의 합동 취재

 

취재를 이어가던 8월, 얼룩소(alookso) 원은지 에디터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추적단 불꽃’ 활동을 하며 n번방을 세상에 알린 인물입니다. 원 에디터는 자신이 지난 1월 제보를 받은 성착취 범죄가 있는데, 함께 취재 보도하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내용을 살펴보니 여중생 피해자 A씨가 당한 성착취 범죄였습니다. 가해자의 아이디와 수법, 계정 등을 파악해보니 KBS가 쫓아왔던 성착취 범죄의 가해자와 같았습니다. 바로 ‘엘’이었습니다.

 

원 에디터와 KBS 합동취재팀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발생하고 있을 수 있는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해 보도를 빨리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미성년자 피해자를 보호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피해자와는 무리하게 대면하지 않고, SNS를 통해 먼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특히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부모의 동의가 있었는지도 거듭 확인했습니다.

 

실제 피해자와 ‘엘’의 대화, ‘엘’의 채팅 캡처 화면 등 취재팀이 확보한 자료들은 일절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피해자들에게 2차 가해가 될 수 있고, 모자이크를 한다 해도 오히려 시청자들의 잘못된 호기심을 자극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재구성한 대화, 관련 없는 사진으로 자료를 아예 다시 만들어 방송했습니다.

 

취재하면서 사내에서 공유할 수밖에 없는 정보도 예민하게 다뤘습니다. 자료나 데이터에 접근 가능한 인원을 제한했습니다.


잊혔던 성착취 범죄, 다시 관심 속으로

 

3년 전 n번방 사건 이후 취재팀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성착취 범죄’를 잊고 있었습니다. 보도 이후 서울경찰청은 한 개 팀이었던 ‘엘’ 사건 수사팀을 여섯 개 팀, 35명으로 대폭 늘렸습니다. 법무부도 나섰습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디지털성범죄 엄정 대응을 대검찰청에 지시했습니다. 과학수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범죄를 끝까지 추적하고, 성착취물 제작·배포 사범은 원칙적으로 구속 수사를 하는 등 강화된 사건처리 기준을 준수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정치권의 움직임도 이어졌습니다. 여야 할 것 없이 성착취 범죄의 근절을 약속했습니다.

 

취재팀은 여전히 ‘엘’을 쫓고 있습니다. 보도 뒤 ‘엘’은 잠적하고 텔레그램을 탈퇴하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흔적은 남아있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행적을 2년 넘게 지켜본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 제보자들은 보도 이후 KBS에 ‘엘’의 범죄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엘’의 주거지나 특성 등 관련 제보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엘’, 그가 잡힐 때까지 취재팀은 취재를 멈추지 않을 겁니다.

  • 필자 : 황현규
  • 소속 : KBS
  • 직함 : 기자
  • 발행 : 2022-10-04
  • 조회수 : 3,568
  • 키워드 : 제2의 n번방 ‘엘’ 추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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